[✝️] 동성애 혐오를 신앙이라 부를 수는 없다
✨ GPT-5.5의 요약
어느 교회 게시판에서 본 동성애 전단을 계기로, 보수적 성윤리와 사람을 병리화하는 무지는 반드시 구별되어야 한다고 정리한 글.

무지의 얼굴
어느 교회 게시판에서 동성애 관련 전단을 보았다.
처음 든 감정은 분노보다 수치심에 가까웠다. 그냥 “동성애를 반대한다”는 수준의 글이 아니었다. 동성애자를 질병, 치료, 에이즈, 문란함, 사회 붕괴의 언어로 한꺼번에 묶어놓은 글이었다.
읽는 내내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게 정말 기독교가 세상 앞에 내놓을 수 있는 말인가.
나는 교회가 성경적 성윤리에 대해 보수적인 입장을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실제로 많은 전통적 기독교 교단은 동성 간 성행위를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가르쳐 왔다. 가톨릭 교리서도 동성 간 성행위에 대해서는 분명히 부정적인 입장을 갖고 있다.
하지만 그 교리서조차 동성애 성향을 가진 사람들을 존중과 연민과 섬세함으로 대해야 하며, 부당한 차별을 피해야 한다고 말한다. 결국 보수적 성윤리를 말하는 것과, 한 인간을 병리화하고 공포의 대상으로 만드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그 구분을 못 하는 순간, 신앙은 쉽게 무지가 된다.
성향과 행위
이런 종류의 글에서 가장 먼저 무너지는 구분은 성향과 행위다.
전통적 보수 기독교의 언어 안에서도 보통은 유혹, 성향, 욕망, 행위를 구분한다. 인간에게 어떤 성향이 있다는 것과 그 사람이 어떤 행위를 선택했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니다. 그런데 전단은 이 구분을 거의 하지 않는다.
동성애자라는 사람 전체를 하나의 병리적 인간군으로 묶는다. 어린 시절의 환경, 식성, 중독, 성적 일탈, 치료 가능성 같은 말을 덕지덕지 붙인다. 그러면 사람은 사라지고 유형만 남는다.
기독교 인간론은 그렇게 말할 수 없다.
기독교가 정말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본다면, 적어도 사람을 먼저 봐야 한다. 죄를 말하더라도 사람을 지워서는 안 된다. 회개를 말하더라도 상대를 짐승이나 병균처럼 묘사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이런 전단은 죄를 말하는 척하면서 인간을 지운다.
선천성과 후천성 사이
동성애를 둘러싼 논쟁에서 “선천적이냐, 후천적이냐”는 질문은 자주 너무 단순하게 쓰인다.
현재 연구들을 보면, 동성애 성향이나 동성 간 성행동을 단순히 “선택”이나 “교육”이나 “환경 탓”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동물에게서도 동성 간 성행동은 관찰된다. 2023년 Nature Communications에 실린 포유류 연구는 동성 간 성행동이 261종의 포유류에서 보고되었고, 그중 상당수는 야생 또는 반야생 조건에서 관찰되었다고 정리한다. 특히 사회성이 강한 종에서 더 자주 나타나며, 유대 형성이나 갈등 완화와 관련될 수 있다고 본다.
인간 연구도 비슷하게 단순한 답을 거부한다. 2019년 Science에 실린 대규모 GWAS 연구는 동성 간 성행동에 유전적 영향이 일부 있음을 보였지만, 동시에 “동성애 유전자” 하나가 있는 것은 아니며 개인의 성적 행동을 예측할 수도 없다고 결론낸다. 분석된 유전 변이 전체가 설명하는 비율도 일부에 그친다. 즉, 생물학적 영향은 있지만 결정론은 아니다.
내 결론은 이렇다.
동성애 성향에는 선천적·생물학적 요소가 분명히 관여한다. 그래서 동성애자를 “환경 때문에 잘못 만들어진 사람”처럼 말하는 것은 사실에도 맞지 않고 신학적으로도 위험하다. 하지만 동시에 인간의 성은 단순한 유전자 명령도 아니다. 발달, 관계, 문화, 자기 이해, 선택, 행동이 복잡하게 얽힌다.
그러므로 나는 두 가지를 동시에 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이미 동성에게 깊은 끌림을 느끼는 사람을 병자나 고장 난 존재로 몰아서는 안 된다는 것.
다른 하나는, 성적 유동성이나 양성애적 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특정 이념, 관계 압력, 쾌락, 공동체 분위기로 한쪽 성적 실험과 정체성 고정으로 밀어붙이는 것도 가볍게 볼 일이 아니라는 것.
기독교적으로 죄를 말하려면 바로 이 지점에서 말해야 한다. 선천적 성향을 가진 사람의 존재를 정죄하는 방식이 아니라, 타인의 욕망과 취약성을 이용해 특정 방향으로 끌고 가는 행위, 책임 없는 성적 실험을 해방처럼 포장하는 행위, 사람의 정체성을 자기 이념의 재료로 삼는 행위를 죄라고 말해야 한다.
나는 이전에 /diary/ai/reservist-anger-to-blog-restart/에서 “동성애 옹호자로 몰릴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인간을 혐오하지 않는 것”을 도마의 길에 가깝다고 정리한 적이 있다. 그 생각은 지금도 같다. 인간을 혐오하지 않는 것과 모든 성적 선택을 선하다고 승인하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니다.
치료라는 이름의 폭력
특히 “동성애 치료”라는 말은 너무 쉽게 쓰이면 안 된다.
현대 정신의학과 심리학의 주류 입장은 동성애 자체를 질병으로 보지 않는다. WHO의 ICD-10에서도 성적 지향 자체는 장애로 간주되지 않는다고 명시되어 있었고, APA도 성적 지향을 바꾸려는 시도는 성공 가능성이 낮고 해로울 위험이 있다고 설명해 왔다.
물론 누군가는 개인적 경험으로 “나는 바뀌었다”고 말할 수 있다. 간증은 존재할 수 있다. 하지만 간증이 곧 일반 법칙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한 사람의 복잡한 삶을 신앙 언어로 해석하는 것과, 모든 동성애자를 치료 대상으로 선언하는 것은 다르다.
교회가 정말 사람의 영혼을 다루는 곳이라면 이 차이를 알아야 한다.
섣부른 치료 언어는 사람을 살리는 말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너는 지금 있는 그대로는 고장 난 존재”라는 메시지가 된다. 그 말은 누군가에게 회개의 초대가 아니라 자기혐오의 감옥이 될 수 있다.
에이즈를 정죄의 도구로 쓰지 말 것
HIV/AIDS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남성과 성관계하는 남성이 HIV에 더 큰 영향을 받는 집단이라는 통계는 존재한다. 그러나 그 사실을 “그러니 동성애자는 더럽고 위험하다”는 식으로 사용하는 순간, 이미 사실을 왜곡한 것이다.
CDC는 HIV 격차를 설명할 때 낙인, 차별, 의료 접근성, 빈곤, 동성애혐오 같은 사회적·구조적 장벽을 함께 말한다. 그러니까 문제는 단순히 어떤 집단의 존재가 아니다. 구체적인 성행위 방식, 예방 접근성, 검사와 치료, 사회적 낙인이 함께 얽혀 있다.
그런데 전단은 복잡한 현실을 정죄하기 쉬운 모양으로 압축한다.
질병을 사람을 때리는 도구로 쓰는 순간, 교회는 진리를 말하는 게 아니라 공포를 유통하는 곳이 된다.
보수적일 수는 있다
나는 이 글을 쓰면서도 일부러 선을 긋고 싶다.
보수적 기독교인이 이렇게 말할 수는 있다.
나는 성경과 전통에 비추어 동성 간 성행위를 하나님의 창조질서와 맞지 않는다고 본다.
이 입장 자체는 하나의 신학적 입장으로 성립할 수 있다. 나는 그 말을 하는 모든 사람을 무지하다고 부르고 싶지는 않다.
이건 내가 예전에 /diary/ai/philosophical-suicide-ai-reformation-tadak-bible/에서 정리했던 기준과도 이어진다. 강한 언어 자체가 폭력은 아니다. 불편한 교리 자체가 폭력도 아니다. 전통적 입장 자체가 곧 무지인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는 것은 다르다.
동성애자는 잘못 형성된 사람이고, 치료되어야 하며, 에이즈와 문란의 위험집단이고, 동성애 인권은 위선이다.
이건 보수적 성윤리가 아니다. 신앙의 이름을 빌린 조악한 혐오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본다.
기독교가 죄를 말하려면 먼저 진실해야 한다. 사실을 왜곡하지 않아야 한다. 사람의 고통을 납작하게 만들지 않아야 한다. 과학적으로 취약한 주장을 신앙의 권위로 포장하지 않아야 한다.
결국 기준은 /diary/religion/hyuk-vs-gpt-4o-ism/에서 붙잡았던 것과 같다. “예수라면 어떻게 읽고 살았을까.” 어떤 교리와 논리가 약자를 살리고, 폭력을 거두고,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는가. 그 기준 앞에서 계속 검증받아야 한다.
무엇보다, 죄를 말하는 사람 자신도 죄인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한다.
나는 침묵하기로 했다
솔직히 말하면, 이 문제를 교회 안에서 직접 말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 그러지 않기로 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 문제를 꺼내는 순간, 전단의 사실관계와 표현 방식이 아니라 “너는 동성애를 옹호하느냐”는 식의 프레임으로 흘러갈 가능성이 너무 크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소모를 감당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침묵한다. 동의해서 침묵하는 것이 아니다. 이 공동체 안에서 건강한 문제제기가 가능하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침묵하는 것이다.
대신 기록한다.
저 전단은 내가 보기에 기독교적으로도, 사실적으로도, 목회적으로도 수준 낮다. 교회가 성경적 입장을 갖는 것과, 사람을 병자로 몰고 공포로 낙인찍는 것은 다른 일이다.
그리고 나는 이 차이를 모르는 무지가 너무 부끄럽다.
무지는 그냥 빈칸이 아니다. 신앙의 언어를 입은 무지는 사람을 다치게 한다. 하나님의 뜻, 성경적 진리, 거룩한 분별이라는 말을 붙이고 사람을 판단하기 때문이다.
다만 여기서 나도 조심해야 한다.
저 전단을 붙인 사람들, 저런 말을 믿는 사람들, 저런 언어를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내가 다시 정죄의 대상으로 삼는 순간, 나도 같은 폭력의 구조 안으로 들어간다. 무지를 비판하다가 사람을 경멸하는 괴물이 되면 안 된다.
실망이 쌓이면 냉소가 되고, 냉소가 쌓이면 경멸이 된다. 나는 그 길로 가고 싶지 않다. 가능하다면, 분노보다 연민으로, 조롱보다 사랑으로, 한 번에 끌어당기는 강한 말보다 천천히 곁을 여는 부드러운 말로 진실에 가까워지고 싶다.
그래서 나는 이 말을 남긴다.
무지는 신앙이 될 수 없다.
그리고 신앙은 무지를 거룩하게 만들어주는 면허가 아니다.
참고
- 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 2357-2359
- Ganna et al., Large-scale GWAS reveals insights into the genetic architecture of same-sex sexual behavior, Science, 2019
- Gómez et al., The evolution of same-sex sexual behaviour in mammals, Nature Communications, 2023
- Bailey et al., Sexual Orientation, Controversy, and Science, Psychological Science in the Public Interest, 2016
- APA Dictionary of Psychology: conversion therapy
- American Psychiatric Association: Position Statement on Conversion Therapy and LGBTQ+ Patients, 2024
- CDC: HIV and Gay and Bisexual Men
- CDC: HIV and Gay and Bisexual Men Vital Signs
- WHO ICD-10: F66 note
댓글 남기기